통장에 한 푼도 없었다
신혼여행을 다녀와서 통장을 봤는데,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.
더 당황스러운 건 그다음이었다. "우리 돈 어디에 썼지?"라는 질문에 둘 다 제대로 답을 못 했다. 큰돈을 펑펑 쓴 기억은 없었다. 그런데 잔고는 0이었다. 분명 우리 손으로 쓴 돈인데, 어디로 갔는지 우리 둘 다 몰랐다.
이게 시작이었다. 돈이 안 모이는 건 그렇다 쳐도, 왜 안 모이는지조차 모른다는 게 더 문제였다.
우리가 진짜 불편했던 것들
가계부 앱을 안 써본 건 아니다. 몇 개 깔아봤고, 며칠 쓰다 다 지웠다. 그러면서 우리가 뭘 불편해하는지가 오히려 또렷해졌다.
- 돈이 어디로 새는지 한눈에 안 보인다. 투명하지가 않다.
- 결산이 너무 귀찮다. 예전엔 현대카드 명세를 붙잡고 했는데, 매번 미루다 결국 안 하게 됐다.
- 무엇보다 — 내역을 일일이 손으로 입력하는 게 너무 귀찮았다. 가계부가 작심삼일로 끝나는 건 늘 이 지점이었다.
그래서 결심했다. 그래, 개발자인 내가 만들자. 우리 둘이 쓸 가계부를.
처음엔 "입력만 편하면 된다"고 생각했다
가장 먼저 만든 건 자연어 기반 내역 입력이었다. "어제 스타벅스 6500원"처럼 문장을 던지면 알아서 내역으로 바꿔주는 기능. 손으로 폼 채우는 게 싫어서 시작한 거니까, 입력만 편해지면 다 해결될 줄 알았다.
그런데 시작하자마자 크게 헤맸다.
삽질은 AI와 일하는 방식이었다. 3개월쯤을 AI와 같이 개발했는데, 정작 AI와 어떻게 일할지를 안 정해두고 시작했다.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개별 프롬프트를 던졌고, AI가 짜준 코드는 매번 어딘가 어긋났다. 결국 내가 다시 열어서 고치거나 새로 쓰는 일이 반복됐다. AI를 쓰는데 왜 내가 더 바쁘지? 그 무렵 꽤 지쳐 있었다.
해결은 모델을 바꾸는 게 아니라 일하는 순서를 고정하는 것이었다.
의사결정 문서화 → 기존 정책과 충돌·모호한 부분 질답으로 정리 → UI 컴포넌트 구현 → 스토리북으로 프리뷰 → 내가 승인 → 에뮬레이터 기반 E2E 테스트 → 내가 직접 써보고 검토
이 순서를 정해두고 나서야 AI가 비로소 "도구"처럼 움직였다. 같은 프롬프트를 줘도 결과가 들쭉날쭉하던 게 사라졌다.
그래서 무엇을 만들었나
지금까지 만든 기능을 정리하면 이렇다.
- 자연어 기반 내역 입력
- 캡처(이미지) 기반 내역 입력 — 보조 기능인 줄 알았는데 실사용 1등이었다. 빠르게 적히는 것보다 틀리지 않게 적히는 게 먼저였다는 걸, 이걸 쓰면서 알았다.
- 내역 추가 시 중복 검사
- 결산 — 카테고리별 지출·수입 비율
- 점검 — 누락·중복 내역 확인
- 맞춤형 목표 예산 설정
- 현금 흐름표 — 미래 시점의 예상 수입·지출에 과거 데이터를 더해 그때의 예상 잔고를 가늠
솔직하게 덧붙이면, 목표 진척도 기능은 아직 제대로 못 만들었다. 지금은 알림과 결산으로 일부만 흉내 내는 중이다. 현금 흐름표도 "되긴 되는데 보완할 게 많은" 상태고.
처음의 불편함, 지금은 어떻게 됐나
신혼여행 끝의 그 빈 통장으로 돌아가, 정직하게 채점해봤다.
돈이 왜 안 모이나 → 이유는 알게 됐다. 그런데 돈은 여전히 안 모인다. 가장 솔직한 결론이다. 가계부는 "왜"를 보여줬지, 대신 모아주진 않더라.
투명성 → 해결됐다. 내역이 한 번에 다 보인다. 게다가 한 명이 몰아 적는 게 아니라 둘이 각자 자기 내역을 직접 올리는 구조라, 기재가 빨라지고 정확도도 올라갔다. 예상 못 한 효과였다.
결산 → 확실히 쉬워졌다. 현대카드 명세 붙잡던 시절과는 비교가 안 된다.
입력하기 싫음 → 해결됐다. AI 입력 덕분에 정말 수월해졌다. 그리고 이게 투명성 해결과도 이어진다. 입력이 쉬우니 바로바로 올리고, 그래서 내역이 투명해졌다.
반대로, 아직 못 푼 것도 있다.
목표 대비 진척 → 못 풀었다. 사실 우리는 아직 목표 자체를 못 세웠다. 그러니 얼마나 왔는지도 모른다. 목표를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동기부여할지는 계속 숙제다.
지출 패턴 → 절반쯤. 어디 많이 쓰는지는 보이는데, 생일이나 어버이날 선물 같은 비정기 이벤트성 지출을 따로 발라내질 못한다. 이건 만들면서 새로 발견한 과제다.
직접 써보는 것보다 빠른 피드백은 없었다
3개월을 돌아보면 가장 많이 배운 건 코드가 아니라, 내 가정이 자주 틀렸다는 사실이었다. 입력은 빠름이 아니라 정확함이 먼저였고, AI는 던진다고 일하는 게 아니라 순서를 깔아줘야 일했다.
기획서 위에서 백 번 토론하는 것보다, 우리 둘이 한 달 써보는 게 훨씬 많은 걸 알려줬다. 우리가 만든 걸 우리가 매일 쓴다는 것 — 그게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무기다.
돈이 왜 안 모이는지는 이제 안다. 모으는 건, 이제부터의 이야기다.
